본문 바로가기
뉴스

[기사] 대구의 여성학 연구자들은 왜, ‘여성학과 지키기’ 투쟁에 나섰나

by Asa_v 2025. 4. 21.
728x90
반응형

1990년부터 35년 이어진 계명대 여성학 끊어질 위기
연구자들 “사회학과 흡수 반대…독립된 학과 개설해야”

지난 4월 14일 대구시 계명대 성서캠퍼스 동천관에 여성학연구소 팻말이 붙어 있다. 이혜리 기자

[주간경향] 최근 10년간 페미니즘은 한국사회의 가장 뜨거운 화두다. ‘페미니즘 리부트(재부흥)’라고 할 정도로 페미니즘에 대한 2030 여성들의 관심이 컸다. 여성 혐오 범죄, 권력형 성폭력, 불법 촬영 등 의제도 많았다. 그러나 동시에 백래시(반동)도 심했다. 대학도 그 백래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총여학생회가 줄줄이 폐지됐고, 여성학 강의에 대한 반발도 나왔다.

최근 대구에 있는 계명대학교 여성학 연구자들이 ‘독립된 여성학과 운영’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다. 학교 측이 정책대학원을 폐지하면서 독립된 학과로서의 여성학과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학생과 동문, 시민사회단체 등이 결합한 ‘계명대 여성학과 지키기 공동대책위원회’가 발족을 준비 중이다. 지난 3월엔 전국의 여성학 연구자 등 936명이 계명대 일반대학원 석사과정 여성학과 개설을 지지한다는 연대서명을 발표했다.

지방 소멸과 학생 수 감소에 따른 경제성 논리로 지역대학의 인문사회계열 학과들이 존폐 기로에 선 것이 하루이틀 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계명대 사태는 여성학과이기 때문에 특별히 살펴볼 지점들이 있다. ‘여성학이 학문이냐’, ‘성차별이 해소됐는데 여성학이 왜 필요하냐’는 질문이 추가로 따라붙기 때문이다. 지난 4월 14일 계명대에서 만난 여성학 연구자들은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여전히 성차별이 존재하고 여성의제가 주변화돼 있다는 의미”라며 여성의 학문할 공간, 독립적인 여성학과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성학은 독자적인 학문”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 9월이다. 계명대에선 정책대학원 산하로 여성학과가 운영되고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19 이후 정책대학원의 학생 모집이 저조해 운영이 어려웠고, 학교 측은 이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당장 올해부터 정책대학원 신입생을 받지 않았다.

문제는 여성학과를 어떻게 할 것인지였다. 계명대는 1990년 여성학대학원 설립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35년간 여성학 교육의 명맥을 유지해왔다. 여성학과와 여성학연구소가 함께 세미나를 열어 학술 활동을 하고, 대구여성영화제와 같은 행사도 주관했다. 한국에 ‘여성학과’라는 명칭으로 여성학 관련 독립적인 학과가 존재하는 곳은 이화여대와 계명대뿐이다. 서울에 있는 이화여대를 제외하면 지역에 여성학과는 계명대 한 곳밖에 없다. 서울대, 서강대, 부산대 등에 협동과정이 있기는 하지만 여성학과에 비하면 입지가 불안정하다는 게 연구자들의 말이다. 여성학과엔 여성학 전임교수가 있는 반면 협동과정에선 다른 학과 교수가 젠더 관련 수업을 한다.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가 2020년 6월 1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우리의 연대가 너희의 공모를 이긴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그래서 안숙영 계명대 정책대학원 여성학과 전임교수를 중심으로 일반대학원에 여성학과 석사과정을 신설해 달라고 신청했다. 하지만 학교 측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학교 운영의 효율성 제고, 학생 수 감소에 따라 학과의 통합·폐지 정책이 진행 중이라는 게 이유였다. 또 2010년부터 이미 사회학과 산하에 여성학 전공을 두고 석·박사과정을 운영해왔다는 점도 들었다. 사회학과 교수들도 같은 이유로 여성학과 석사과정 신설을 반대했다. 이 과정에서 최종렬 사회학과장이 여성학과 박사연구자들의 논문심사위원과 심사위원장에 사회학과 교수를 넣으라고 요구해 연구자들이 반발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대로면 여성학과는 독립된 학과가 아니라 사회학과의 한 전공으로 운영되는 것이다.

계명대의 여성학 연구자들은 사회학과에 종속된 여성학과가 아니라 독립적인 여성학과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성학이 ‘복합학’으로서 여러 학문을 넘나드는 특성이 있고, 학문적 독자성도 있다고 했다. 그동안 여성학 교육과 연구도 실질적으로 정책대학원 여성학과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임은경 계명대 여성학연구소 전임연구원(52)은 여성학과를 사회학과 산하에 두느냐 안 두느냐, 논문심사위원을 누구를 넣을 것이냐는 단순한 절차 문제가 아니라 연구 내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했다. 임 연구원은 “예를 들어 ‘남성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사회학과와 여성학과가 바라보는 것이 다르다”며 “(사회학과 특성이 강화되면) 여성학의 기준으로 아니라고 생각하는 개념도 들어와야 하는 지점이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여성학 고유의 연구가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계명대에서 여성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태영씨(33)는 “사회학과에 여성학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분이 없기 때문에 흡수해서 권한을 가져간들 교육이 잘되기 어렵다고 본다”고 했다. 김씨는 “여성학은 복합학으로 학문으로서의 인식론적인 넓이가 더 넓다”며 “사회학과에 편입되는 게 애초부터 말이 안 된다”고 했다.

김혜경 전북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여성학은 사회학이나 인문학 등 다른 학문적인 칸막이에 한정되지 않는 폭넓은 방법론과 인식론을 갖고 있다”며 “기존의 학문적 통념으로만 따지면 여성적인 관점에서 연구해야 할 영역들이 많이 소실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예를 들어 돌봄이나 몸의 문제, 재생산 같은 영역이 굉장히 중요한 주제들인데 기존 학문의 인식론상에서는 중요한 학문적 대상으로 잡히기 어렵다”며 “학문으로서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보장하고, 가장 근본적인 이론과 틀을 세우고 확산시키는 중심축이라는 점에서 여성학과라는 독자성을 유지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최종렬 사회학과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지역 대학에서 여성학이 독자적으로 생존하기 힘들기 때문에 2010년 사회학과의 세부 전공으로 여성학이 들어온 것”이라며 “비록 사회학이라는 우산을 썼지만 들어와서 여성학을 할 수 있고, 사회학 공부를 토대로 여성학을 하면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최 학과장은 “(이번 사태는) 사회학과 여성학의 갈등이 아니라 꼭 필요한 학문들을 시장논리에서 벗어나 어떻게 살릴 것인지의 문제”라며 “경영을 하는 학교 입장에선 (소수학문이) 돈이 안 되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고, 국가 정책 차원에서 지원해줘야 한다”고 했다. 논문심사위원 구성에 대해선 “규정대로 한 것”이라고 했다.

세계여성의날인 2023년 3월 8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에서 학생들이 여성의 삶을 응원하는 메시지를 담은 비누 장미를 시민단체로부터 받은 뒤 사진을 찍고 있다. 성동훈 기자
“차별 구조, 맞서는 언어 배워”

대학 내에서 여성학의 지위는 계속해서 부침을 겪었다. 이화여대가 한국 최초로 1977년 학부 교양과목으로 여성학을 개설했다. 1982년 여성학과가 개별 학과로 독립해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민주화가 이뤄진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까지 주로 총여학생회 요구로 대학에 여성학 강의가 늘었다. 2000년대 들어 대학들은 여성학 학위과정을 다시 폐지한다. 대학 서열화가 심해지고 낮은 출생률, 학령인구 감소로 인해 지역대학들은 구조조정으로 내몰렸다. 인문사회계열의 학과들이 벼랑의 끝에 섰다.

이번 계명대 사태는 페미니즘 리부트와 백래시라는 맥락에도 놓여 있다. 2015년 메갈리아의 출현, 2016년 강남역 10번 출구 여성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에 대한 2030 여성들의 관심이 급격히 커졌다. 동시에 대학에선 총여학생회가 줄줄이 폐지됐고, 여성학 강의도 덩달아 사라졌다. 동덕여대 학생들의 남녀 공학 전환 반대 투쟁에선 ‘여대 무용론’도 부각됐다. 김인선 부산대 여성연구소 교수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지난 대선을 기점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반동과 역풍이 더 거세지면서 학교 현장의 분위기는 차갑게 얼어붙었다”며 “여성학이 의미 있고 필요한 학문이라는 사회 전반의 동의가 (페미니즘 리부트가 시작된) 2010년대 중후반부터 지속해 확산했다면 손쉽게 여성학과를 없앤다는 결정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계명대 여성학과는 독립된 학과로 남을 수 있을까.

한국의 성평등 수준은 결코 높지가 않다. 2023년 세계경제포럼(WEF)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의 젠더 격차 지수는 전체 146개 국가 중 105위였다. 지난 4월 17일 여성가족부 발표에 따르면 2023년 국가성평등지수는 65.4점으로 전년보다 0.8점이 더 떨어졌다. 2010년 측정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하락했다. 의사결정과 돌봄 영역에서 성평등 수준이 특히 낮았다.

강남역 10번 출구 여성 살인사건 3주기 추모제가 열린 2019년 5월 17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시민들이 헌화한 꽃과 추모글이 놓여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계명대 여성학 연구자들은 다양한 이유와 경로로 이곳에 왔지만,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차별과 배제가 발생하는 사회의 구조를 이해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언어와 실천을 배웠다고 했다. 이들이 말하는 여성학과는 한마디로 ‘가부장제에 맞서는 지식생산 공동체’였다.

임은경 연구원은 30년 가까이 병원 여성의학과에서 일한 간호사였다. 임 연구원은 “여성 환자들을 보면서 출산을 의학적으로만 접근해 여성이 배제되는 문제를 느끼게 됐고, 변화와 해결방안을 만들 수 없을까 고민하다 계명대로 오게 됐다”고 했다. 임 연구원은 여성학에 대해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며 “차별과 배제로 인해 화가 났던 것이 왜 그런지 정확히 알게 해주는 것뿐 아니라 이것을 어떻게 하면 바꿔볼 수 있겠다는 희망과 가능성을 알게 해준다”고 했다. 그는 “간호사 일을 하면서는 통념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지만 점점 변해가고 있고, 지금은 (여성학과 폐지 건으로 인해) 투쟁 아닌 투쟁을 하게 됐다”며 “계명대 여성학과가 폐지되거나 사회학과에 흡수된다면 저처럼 뭔가를 찾아서 해보고 싶고 다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사람들이 암담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성수진씨(33)는 직장에 다니던 중 페미니즘 리부트와 맞물려 계명대에서 여성학 공부를 시작했다. 성씨는 “성별, 계급, 학력, 결혼 여부 등으로 인해 겪는 차별을 스스로 인지하고 그런 차별이 사회적·구조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을 이해하게 됐다”며 “차별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게 됐다는 점도 있다”고 했다. 특히 다른 의견을 이해하는 게 여성학이라고도 했다. 성씨는 “나의 위치를 스스로 깨닫고 상대방의 위치도 생각하면서 양극단의 의견들이 어떻게 하면 조금 더 가까워져 우리의 삶을 낫게 하는 정치적 목소리로 연결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여성학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성씨는 “예전에는 남성을 혐오하는 방식의 여성 페미니즘을 생각했다면, (대학원에서는) 그런 것들이 깨지고 모든 성별이 평등하게 잘사는 방법을 배웠다”며 “남성 혐오적인 행위도 어떻게 보면 억압이고 차별이라는 성찰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소위 젠더 갈등도 여성학 공부를 통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태영씨는 “무작정 부당함과 불평등에 맞서기 위해 광장에 나갔을 때는 문제를 언어화하기 어려워 한계를 느꼈다”며 “정치력이 있는 언어를 배우는 공간이 여성학과라 생각하고, 여기서 더 잘 투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것 같다. 꼭 필요하다”고 했다.

“신입생 없어 학습권 침해도”

현재 정책대학원 여성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학습권이 침해될 수 있는 상황이다. 울산에서 폭력 예방 강사로 활동하다 젠더 기반 폭력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싶어 계명대를 찾았다는 유경화씨(43)는 매주 화요일 울산에서 대구까지 왕복 4시간 거리를 오가며 4학기째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달에야 여성학과 폐지 이야기를 들었다. 유씨는 “디지털 기술 발달로 인해 여성에 대한 폭력, 차별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이런 문제를 수면 위로 올리고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여성학이 필요하다”며 “(대학원 교육은)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공부하는 힘도 주는 것인데 신입생이 없다는 점에서 학습권을 침해당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2학기 여성학과 신입생으로 들어오자마자 폐지 이야기를 들었다는 김민정씨(39)도 “혼자 이론을 공부하는 것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면서 다양한 시각을 나누는 게 대학원에 온 중요한 지점이었는데 그게 안 되는 게 학습권 침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대구에서 10년가량 시민운동을 한 김씨는 제대로 페미니즘을 공부해보고 싶어 계명대로 왔다. 김씨는 “학생은 논의의 당사자로서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라며 “사회학과에 여성학과가 통폐합된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대화 없이 개설 불가 통보를 받는 과정으로 진행되는 것은 여성주의와 맞지 않고 폭력적이기도 하다”고 했다. 김씨는 “여성학이 왜 필요하냐, 왜 독립적인 학과로 있어야 하냐를 계속 증명해야 하는 것 자체가 한국사회에서 여성의제나 여성주의 담론의 위치를 보여준다”고 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