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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드라마

살해당한 여성, 도둑맞은 퀴어, 증발한 페미니즘 메시지 [왜곡 각색 원작 훼손] 정년이 좋은 기사 3개

by Asa_v 2024.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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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이’, 소리치는 웹툰과 침묵하는 드라마

‘워맨스’는 살렸으나
여성 퀴어 로맨스는 뺀 드라마
여성교육·여성문인 조명한
원작의 메시지도 빠져

*이 글은 작품의 줄거리와 결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웹툰 '정년이'(글 서이레·그림 나몬). ⓒ네이버웹툰


1950년대를 풍자한 여성 소리꾼들의 공연 예술인 여성국극. 웹툰 '정년이'는 여성국극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다양한 여성들의 반짝이는 열망과 갈등을 촘촘하게 엮어낸다. 기본적으로는 여성국극 배우가 돼 떼돈을 벌겠다고 큰소리치던 정년이가 진정한 배우로 거듭나는 이야기지만, 모든 등장인물에게 여성국극은 각기 다른 이유로 소중하다. 상충하는 가치들 속에서 이들은 함께 성장한다. 

인물들의 각기 다른 여성국극에 대한 사랑이 정점을 찍는 시점은 원작 속 마지막 무대인 '쌍탑전설'의 오디션 에피소드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정년이' 역시 '쌍탑전설'을 극중극으로 성실하고 절절하게 표현해 호평받았다. 그런데 원작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지만, 드라마에선 언급되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쌍탑전설' 극본을 쓴 여학생 '권부용'에 대한 것이다. 


웹툰 '정년이'(글 서이레·그림 나몬). ⓒ네이버웹툰


권부용은 여성 교육의 장인 여학교를 다니고, (1950~60년대 여성 동성 애인을 일컫는) 'S언니'가 있고, 아버지 같은 극작가를 꿈꾼다. 그러나 부용의 극본은 정략결혼 상대 남성의 이름으로 대회에 제출돼 수상한다. 분노해 항의하지만, 돌아온 것은 모르는 체하는 약혼남과, 여학생의 긍지를 버리고 남자와 붙어먹었다는 오명뿐이다. 게다가 지금껏 아버지가 쓴 줄 알았던 모든 대본이 사실은 어머니의 작품을 훔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웹툰 '정년이'(글 서이레·그림 나몬). ⓒ네이버웹툰


타인보다도 자기 자신을 넘어서야 하는 주인공 정년이와 달리, 부용이 맞서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보다 크고 오래된 가부장제와 성차별, 동성애 혐오의 굴레다. 극본을 도용당한 그의 불행은 실제로 남성에게 공로를 빼앗겨 온 여성 문인들의 계보를 잇는다. 여학교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자유로운 학생이 아닌 누군가의 아내가 돼야 하는 비극 역시 세대를 거듭하며 지속된 위협의 역사다.

그러나 부용은 펜을 놓지도, 결혼하지도, 죽지도 않는다. 매란국극단을 다시 일으킨 역작으로 평가받는 '쌍탑전설'을 집필하고, 결혼식을 뛰쳐나와 사랑하는 윤정년에게 달려간다. 부용은 오직 정년이를 생각하며 극본을 썼고 정년이는 오직 권부용 한 사람만을 위한 사랑을 연기한다.


  
웹툰 '정년이'(글 서이레·그림 나몬). ⓒ네이버웹툰


레즈비언, 여학생, 그리고 도용당한 작품의 원작자라는 부용의 상징성을 고려할 때, 그의 존재는 삭제하나 그의 작품은 남겨두는 드라마의 선택은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다. 드라마의 마지막 화에 결혼을 통해 가부장제에 포섭되는 여성은 있지만 사랑하는 여배우를 위해 뛰쳐나가는 여학생은 보이지 않는다. 워맨스는 있지만 퀴어 로맨스는 없다. 이는 단순히 역사 고증을 위한 선택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역사적 맥락'이나 '시대 고증'을 작품 속 여성혐오와 동성애 혐오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마치 지금은 그 모든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옛날에는 그 모든 폭력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으니 역사물 역시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웹툰 '정년이'는 이러한 가정에 도전하는 중요한 작품이다. 여성에겐 목소리가 없었다고 말하는 역사를 향해 여성국극 배우의 소리를 들려주고, 당대 여성 교육은 결국 현모양처를 기르기 위함이었다고 말하는 역사를 향해 여성 극작가를 내세웠다. 


웹툰 '정년이'(글 서이레·그림 나몬). ⓒ네이버웹툰


그렇기 때문에 웹툰에서는 존재하던 여성의 목소리와 사랑이 TV드라마에서 삭제됐다는 사실은 레즈비언 캐릭터가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은 픽션이어야 하고, 그것도 여럿이 동시에 공유할 수 있는 시청각 매체 말고 혼자 읽는 만화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드라마 '정년이'가 남긴 아쉬움이 원작 웹툰의 전복적 가능성을 부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작 웹툰이 삭제된 여성국극 문화와 퀴어 서사를 다루는 만큼, 드라마도 상업적 이익 추구를 넘어 퀴어 여성 서사 가시화라는 공익적 대의를 수행할 기회가 있었다.¹ 웹툰은 소리치는데 드라마는 침묵한다.

여성들의 사랑 이야기는 시대상을 반영한다는 이유로 대중 앞에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이는 정확히 어느 시대를 반영한 결과인가? 본질적으로 퀴어했던 여성국극의 시대인 1950년대인가, 여전히 여성 교육의 장이 위협받고 레즈비언이 방송에 등장하는 것조차 금기시되는 현시대인가? 여성이 설 곳이 자꾸만 사라져가는 사회는 드라마와 역사책 속 과거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기어이 성차별과 퀴어 혐오가 당연한 시대, 여성 교육과 여성 문화의 장이 삭제되는 시대를 과거라고 부르고 싶다면, 우리는 아직 과거를 살고 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310/0000120675

 

‘정년이’, 소리치는 웹툰과 침묵하는 드라마

*이 글은 작품의 줄거리와 결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950년대를 풍자한 여성 소리꾼들의 공연 예술인 여성국극. 웹툰 '정년이'는 여성국극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다양한

n.news.naver.com

 

도둑맞은 ‘퀴어’

퀴어 서사를 이성애 서사나 혹은
알 수 없게 둔갑시키는 ‘헤테로베이팅’

 

지난 8월 13일에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예고편이 공개되었다. 이 영화의 원작은 2019년에 출간한 박상영 작가의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이다.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에 수록된 연작 중 첫 번째 소설인 「재희」는 게이인 화자 ‘흥수’와,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았던 친구이자, 한때 룸메이트였던 이성애자 여성, ‘재희’에 관한 이야기다. 평판이 좋지 않은 여성 ‘재희’, 그리고 주변에 자신의 게이 정체성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는 ‘흥수’의 소설 속 관계는 ‘칙릿(chick-lit)’ 드라마에서 흔히 등장하는 잘나가는 여성의 패셔너블한 게이 친구와의 관계와는 다르다. 재희와 흥수가 같이 살게 된 것은 재희의 집을 훔쳐보는 남성 때문이며, 흥수는 재희와의 동거를 게이 정체성을 가릴 연막으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재희의 임신중절수술에 함께 가주고 미역국을 끓여주는 것은 흥수이며, 흥수의 전 남자친구들이 찾아와 난리를 칠 때 그들을 처리하는 것은 재희이다. 이러한 두 사람의 소설 속 관계는 호모포빅하고 여성 혐오적인 한국 사회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런데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예고편에서 흥수와 재희는 마치 로맨틱 코미디를 찍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흥수가 게이인지조차 알 수 없는 예고편과 마주했을 때, 퀴어 당사자인 독자로서 나는 너무 당혹스러웠다. 실제로 예고편이 게시된 유튜브 댓글을 읽어보면 두 사람의 관계를 이성애적 관계로 읽는 댓글을 많이 볼 수 있다. 


‘퀴어베이팅(Queer-baiting)’이라는 용어에서 ‘베이팅(baiting)’은 미끼를 의미한다. 본편에 퀴어 서사가 등장할 것처럼 편집한 예고편은 퀴어베이팅의 대표적인 예시다. 퀴어 팬덤의 구매력을 노리고 퀴어 친화적으로 편집한 예고편을 공개한 다음, 정작 본편에서는 예고편과 다른 서사를 보여주는 미디어 행태를 비판하기 위해 ‘퀴어베이팅’이라는 용어가 생겼다. 그런데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예고편을 보고, 나는 ‘퀴어베이팅’이라는 용어만큼이나 퀴어 서사를 이성애 서사, 혹은 퀴어가 등장하는지 알 수 없는 서사로 둔갑시키는 행태를 지적할 만한 ‘헤테로(heterosexual, 이성애)베이팅’ 같은 용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영화가 개봉하지 않았으니 영화의 내용이 어떨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원작은 퀴어 서사로서 많은 퀴어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소설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만약 소설에서 퀴어 서사가 지워지지 않고 영화로 각색되었다면, 예고편에서 인물의 정체성이 지워져야 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캐릭터의 게이 정체성은 왜 예고편에는 나올 수 없었을까?

영화 <대도시의 사랑> 예고편을 본 지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서 웹툰 『정년이』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정년이>에 원작의 ‘부용’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제작진의 인터뷰 소식을 들었다. ‘부용’은 웹툰 원작에서 주인공 ‘정년’의 팬으로, 이후 ‘정년’과 사랑을 키우는 역할로 등 장한 레즈비언 캐릭터이자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심인물이다. 지난해 같은 웹툰을 원작으로 국립극장에 무대를 올린 국립창극단의 창극 <정년이>에서도 ‘부용’과 주인공 ‘정년’의 로맨틱한 관계성은 ‘정년’과 ‘영서’의 라이벌 관계만큼이나 극의 중심이었으며, ‘부용’이 남자와의 결혼을 거부하고 ‘정년’에게 돌아오는 것은 극의 클라이맥스이기도 했다. 전통 창극에서도 원작의 ‘부용’이 가진 퀴어한 의미를 지우지 않고 극을 올린 마당에, 드라마는 ‘부용’을 지우기로 한 것이다. 원작이 그만큼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여성국극을 바탕으로 한 여성 서사였던 점 도 있었지만, 그만큼 여성 간의 사랑이 서사의 중심이었던 점이 수많은 여성 퀴어 독자들로부터 사랑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드라마 <정년이>에서는 둘의 퀴어한 관계성이 지워질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드라마는 퀴어 서사로 떨친 원작의 유명세를 광고하지 않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또 다른 ‘헤테로베이팅’인 것이다. 

지난 8월 11일 대전에 극단 ‘OWTTO(오토)’의 연극 <이건 이름 없는 이야기야>를 보러 갔다. 대전은 올해 처음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지역이기도 하지만, 충청권에서 유일하게 퀴어문화축제를 개최한 지역이기도 하다. 대전은 큰 도시이지만 여전히 퀴어의 인권 앞에서 보수적인 지역이다. 연극 <이건 이름 없는 이야기야>는 퀴어 당사자 관객들의 사연을 바탕으로 즉석에서 장면을 구성하는 연극이었다. 무대는 퀴어로서 자신을 검열했던 이야기, 혐오 당했던 이야기, 가족에게 정체성을 숨겨야 했던 이야기 등 솔직한 퀴어 당사자의 이야기들이 그려졌다. 연극의 내용만큼이나 이 연극에서 중요하게 느껴졌던 것은 제작진들로부터 보수적인 지역에서 ‘퀴어’를 주제로 연극을 올리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듣는 일이었다. 사실 한국에서 ‘퀴어’를 주제로 무언가를 안전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공간은 여전히 극히 드물다. 많은 이들이 그러한 시공간을 넓히기 위해 혐오를 두려워해 가며 고군분투하여 어렵게 퀴어 서사를 한국 사회에 내놓고, 나아가 인기를 얻고, 팬덤을 일구어내면, 이를 다시 발목 잡고 원점으로 돌려놓는 것이 바로 앞서 말한 ‘헤테로베이팅’의 사례들이다. 하지만 더이상 퀴어 서사를 도둑맞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고 싶지 않다. 

https://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1160

 

[여성논단] 도둑맞은 ‘퀴어’

지난 8월 13일에 영화 예고편이 공개되었다. 이 영화의 원작은 2019년에 출간한 박상영 작가의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이다.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에 수록된 연작 중 첫 번째 소설인 「재희

www.womennews.co.kr

 

'정년이'가 대박 났다고 지레 겁먹고 뒤로 빠진 각색자들이 용서되는 건 아니다

정년이’ 제작진이 끝까지 설득하지 못한 권부용 캐릭터 삭제

https://v.daum.net/v/20241121162343725

 

'정년이'가 대박 났다고 지레 겁먹고 뒤로 빠진 각색자들이 용서되는 건 아니다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 <정년이>에서 신경 쓰인 게 한둘이 아니지만,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윤정년(김태리)과 홍주란(우다비)이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다

v.daum.net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 <정년이>에서 신경 쓰인 게 한둘이 아니지만,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윤정년(김태리)과 홍주란(우다비)이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다방이다. 깔끔한 파란 목조 간판 위에 파스텔 티 룸이라고 쓰여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웬만한 방송국 스튜디오 만한 공간이 나오는. 1950년대 서울에 이런 곳이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공간이 꼭 현실세계를 1대 1로 모방할 필요도 없음에도 이 공간이 거슬리는 건 이 다방이 한국에서 드라마와 영화를 만드는 수많은 사람들의 별로 좋지 못한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사람들은 한국이라는 공간, 이 공간이 거쳐온 과거를 수치스러워 한다. 확인하고 싶다면 지금 할리우드에서 나오는 20세기 배경 영화를 아무 거나 하나 골라,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한국 영화와 비교해 보라. 거의 대부분의 한국 영화에서 배경이 되는 시대와의 심각한 단절이 느껴진다. 과거를 부끄러워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지금 한국 사람들이 옛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정년이>도 양쪽 다일 거 같긴 한데, 그래도 나는 오늘 전자를 지적하고 싶다. <정년이>가 그리는 서울은 새마을 운동 홍보자료처럼 검열된 공간이다. 지저분하고 가난해 보이는 모든 것은 은폐되고 삭제되었다. 마치 1950년대 주제 테마파크처럼 보인다. 어느 정도 빈곤의 흔적이 보이는 건 정년의 고향 목포뿐이다. 그 사람들은 이건 괜찮다고 생각한 거 같다. 서울이 아니니까.

이건 심각한 문제다. 여성국극이 당시 인기를 끌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전란 이후, 빈곤과 부당함과 고통에 시달리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고단한 현실을 잊을 수 있는 판타지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현실 세계의 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여성국극을 다루는 드라마가 과연 힘을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걸 잊는다면 그 공간은 심지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도 않는다. 도시 공간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은 늘 동시대의 현실 조건과 연결되어 있다. 이걸 제거한다면 플라스틱 장난감 정도의 미감밖에 남지 않는다.

<정년이>가 은폐한 것은 표면적인 빈곤뿐만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멈추어 서서 생각하게 하고 고민하게 하고 움찔하게 하는 모든 것들은 일단 다 잘라낸다. 예를 들어 원작에서 정년이의 가요 스승인 패트리샤는 가정 폭력의 희생자이고 원작은 이를 가감없이 정확하게 다룬다. 하지만 드라마는 패트리샤(이미도)를 대충 '이혼녀'로 설정하고 그 사연을 묻어버린다. 남장을 하고 다니며 성별이분법적 관점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정년이에게 가르쳐주는 고사장은 등장하지도 않는다. 이 드라마에서 남장은 오로지 환상 속의 왕자님을 추구하는 남역배우들에게만 허용된다.

이 공허함의 절정을 이루는 건 방영 전부터 논란을 일으켰던 권부용 캐릭터의 삭제이다. 원작을 안 읽은 사람들에게 설명한다면 이건 로빈 후드 이야기를 하면서 마리안을 지우는 것과 같다. 부용 없이 진행되는 이야기가 꽤 부분을 차지하지만 결국 있어야만 이야기가 완성된다. 아니, 부용은 마리안보다 더 중요하다. 원작의 후반부에 이르면 그때까지 이어지던 주인공 정년의 서사는 부용의 존재에 의해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쓰여지고 그것의 최종 종착지는 클라이맥스인 '쌍탑전설'이다. 그렇다. 그 국극의 저자가 권부용이다.

권부용은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하는 캐릭터이다. 주인공의 연애 상대이기도 하지만 가부장제와 남성우월주의, 호모포비아에 깔려 무시되고 잊힌 여성 예술가를 대표한다. 무엇보다 부용은 <정년이>가 다루는 여성 국극의 세계를 확장한다. 부용은 관객이고, 비평가이고, 무엇보다 작가이다. 이야기를 담은 공연에서 그 이야기를 누가 썼는가는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데 드라마는 이 캐릭터를 잘라냈다. 이건 굉장히 비정상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그 동기는 단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있다. 호모포비아. 공식적인 이유는 12부작 안에서 다른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해서라지만 당연히 그건 설득력이 없다. 일단 tvN으로 넘어가기 전인 MBC 시절부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부용을 제거하려는 계획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3시간 안쪽인 창극 버전에서도 부용은 멀쩡하게 존재했다. 그리고 12부작은 결코 짧은 편이 아니다.

드라마가 원작에 꼭 충실하라는 법은 없다. 더 나은 길이 있다면 그 길을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는 그 더 나은 길이 보이지 않는다. 당연한 것이, 더 나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어서 부용을 자른 게 아니라 일단 잘라놓고 핑계를 찾았던 것이다. 드라마 각본에는 이런 식으로 각색된 텍스트의 절단면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예를 들어 원작의 '쌍탑전설'은 부용의 작품이라는 데에서 의미를 갖고 그를 위해 설계되었다. 그 가장 중요한 요소가 제거되면 텅 비어보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드라마는 끝까지 그 공연이 특별한 이유를 찾으려다 실패한다.

이 드라마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비유는 추리소설의 살인사건 같다는 것이다. 특히 부용을 구성하던 행동과 대사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갈 때는 거의 토막살인의 현장 같다. 그리고 각본은 마치 이 살인을 은폐하기 위한 작전과 같다. 시체를 어디다 묻고, 어떻게 거짓증언으로 알리바이를 조작하고. 부용이 당당하게 자신의 성적지향성을 밝히는 퀴어 캐릭터였을 뿐만 아니라 1950년대 여성예술가들이 겪은 부당함을 고발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이 은폐는 더더욱 추리소설 같다. 살인은 저질러졌고 증언은 묻혔다. 그리고 다들 그걸 모른 척한다. 퀴어 요소들이 다 지워졌냐고? 아니다. 적당히 오타쿠들이 착즙할 정도는 남겨놨다. 시청자들이 알아서 채우라고 떡밥을 던져주고 각색자들은 비겁하게 뒤로 빠진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 결과물은 화제성과 시청률에서 모두 대박을 냈을지는 몰라도 비겁하고 안전한 선택에 따른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원작을 이루고 있던 모든 주제는 날아갔다. 퀴어 캐릭터는 살해당했고 페미니즘 메시지를 구성하던 모든 재료들은 증발했다. 그래놓고 그냥 여자들이 많이 나오는 '여성서사'이니 만족하라고 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더 어이가 없는 것은 2024년은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때라는 것이다. 이미 10여년 전에 <바람의 화원>은 두 여성 콤비에게 커플상을 주었고 아무도 뭐라지 않았다. 얼마 전엔 주인공 중 한 명이 커밍아웃을 한 <마인>이 있었고 다들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지금의 드라마 시청자들에게 권부용의 존재는 특별히 위험하지도 도전적이기도 않다. 그런데도 지레 겁을 먹은 사람들은 비겁함과 변명 속으로 달아났다.


드라마 <정년이>이 망가질 수 있는 길은 많았다. 모든 창작과정이 그런 위험을 품고 있다. 아무리 재료와 의도가 좋다고 해도 만들기 직전까지는 어떤 작품이 나올지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걸 고려한다고 해도 드라마 <정년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비겁함'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차라리 만들지 않는 것이 낫지 그래서는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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