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형태를 깊이 봐야 하니 세밀화 그림은 연구에도 도움”
[짬] 그림 그리는 식물학자 신혜우 박사
‘식물학자의 숲속일기’를 쓴 신혜우 박사.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요즘은 난초입니다. 난초는 종이 엄청 많지만 종의 개체 수는 많지 않아요. 그래서 멸종위기종이 많습니다. 난초를 연구하면 다른 식물 보전에도 도움이 많이 됩니다.”
식물세밀화가이자 식물학자인 신혜우 박사에게 특히 끌리는 식물에 관해 묻자 나온 답이다. 2019년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기생식물의 엽록체 유전체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지난 2년 미국 메릴랜드주 스미스소니언 환경연구센터에서 난초와 곰팡이 공생 관계 연구로 박사후과정을 밟았다.
이달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생물학 학회인 영국 런던학회(1788년 창립)가 과학적인 식물 그림을 그린 연구자나 화가에게 수여하는 질 스미시스상을 받았다. 앞서 2013년부터 영국왕립원예학회의 보태니컬(식물) 아트 국제전시회에 네번 참여해 모두 금메달을 받기도 했다.
그는 식물 이야기를 풀어주는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2021년 나온 첫 책 ‘식물학자의 노트-식물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3만6천권이나 나갔고 2022년에는 식물을 매개로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풀어낸 책 ‘이웃집 식물상담소’를 펴냈다. 이달 초에는 스미스소니언 환경연구센터에서 식물과 만나는 동안 틈틈이 써온 글을 엮은 세번째 책 ‘식물학자의 숲속일기’(한겨레출판)가 나왔다.
2년의 국외 연구 과정을 마치고 최근 귀국한 저자를 지난 17일 오후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식물학자의 숲속일기’ 표지.
“저는 숲 속을 걸을 때 뭔가 눈에 띄면 바로 (제 생각을) 녹음합니다. 그런데 숲에서는 매번 그런 일이 생겨요. 이번 책에 나오는 호랑가시나무나 낙엽에 대한 글도 그렇게 썼죠.”
그림을 무척 좋아한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 때면 늘 호랑가시나무를 그렸다는 그는 이번 책에서 호랑가시나무를 두고 “겨울을 나는 지혜와 너그러움을 몸소 보여주는 성스럽고 아름다운 나무”라고 썼다. ‘호랑가시나무는 겨울에도 풍성하고 가시가 많은 잎 때문에 새들에게 폭풍과 포식자를 피하는 피난처가 되고 겨울 양식이 되는 빨간 열매도 선물한다.’ 호랑가시나무 특유의 생존 지혜는 초식동물 접근을 막으려 나무 위보다 아래쪽 잎에 가시가 많고, 겨울 추위를 견디기 위해 잎이 단단하고 도톰하다는 점이다.
책에는 그가 지난 2년 연구한 난초와 곰팡이의 공생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담겼다. 그는 박사후과정 중 ‘곰팡이 유무에 따라 난초 뿌리에서 내뿜는 화학물질이 어떻게 다른지’ 등의 연구 과제를 수행했다. 그 목적은 모두 “난초와 곰팡이 보전”이다.
“난초는 특이하게도 곰팡이가 없으면 자연 상태에서 싹 트지 않아요. 발아할 때 영양분을 제공해주는 배유(양분 저장 조직)가 없어서죠. 스스로 발아할 수 없는 난초의 씨앗을 뚫고 들어가 영양분을 공급하는 곰팡이도 있고, 난초가 다 자란 뒤 뿌리 세포에까지 침투해 영양분과 미네랄을 공급하는 곰팡이도 있습니다. 그래서 곰팡이가 부족하면 난초는 다 사라집니다.”
경북대 생물학과 학부 시절 지도교수 권유로 식물세밀화를 그리기 시작한 그는 지난 2년 축적한 자료를 기반으로 앞으로 북미 자생 난초 세밀화 시리즈도 그릴 계획이다.
신혜우 작 ‘섬기린초’ 51x60cm_종이에 수채_2018년 제작. 신혜우 작가 제공
신혜우 작 ‘겉씨식물 열매와 씨앗’_300x53cm_종이에 수채_2023년 제작. 신혜우 작가 제공
식물세밀화는 대상 식물에 관한 과학적 문헌을 철저히 조사한 뒤 이를 기반으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는 그림이다. 식물 신종이나 미기록종 관련 논문에는 그림을 붙이도록 하는데 이 용도로 활용된단다. 그는 “세밀화를 그리는 식물학자는 세계적으로도 손으로 꼽힌다”고 했다. “지금보다 18, 19세기 세밀화가 더 뛰어납니다. 그때는 많은 생물학자가 직접 그렸거든요. 당시 학자들은 현미경을 보며 식물 형태를 연구했어요. 지금은 디엔에이(DNA) 연구 등 식물학이 훨씬 다양화되었어요.”
학술 외 용도의 그림도 그리는지 물었다. “화장품이나 식료품 포장 패키지나 어린이 교육과 전시에 들어가는 그림을 그릴 때도 있어요. 상업용 그림을 처음 그릴 때는 고민이 많았어요. 그림이 예뻐 보여야 하니 (의뢰 회사에서) 원래 다섯개인 찔레꽃잎을 더 늘려달라고도 하더군요. 처음엔 괴로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과학자들이 그림 비용이 없을 때 무료로 그려주자고 생각하니 회사에서 번 돈을 과학자를 위해 쓰는 셈이거든요.”
경남의 시골 동네에서 살던 어릴 때부터 식물이 제일 신기하고 예뻤다는 신 박사는 초등 1학년 때는 그렇게 가기 싫던 학교를 일요일에 혼자 찾기도 했단다. 노란 은행나무 잎들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광경을 보기 위해서다. “제가 6살 때 부모님이 식물도감을 사주셨어요. 어린 딸이 식물 이름을 묻고 또 묻는데 답할 수 없어 도감을 구해주셨다고 해요.”
‘식물에 빠진 어린아이’라니 또래 친구와 어울리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고 하자 그는 “대학에서 식물학을 하기 전까지는 외로웠다”며 말을 이었다. “식물분류학회에서 만난 학자들도 대부분 저처럼 어린 시절을 보냈더군요. 식물학은 사실 외울 게 너무 많아 어린 시절부터 관심을 갖지 않으면 따라가기 쉽지 않아요. 우리나라만 식물이 4천종입니다.”
과학적인 식물화 그린 공적으로 최근 런던린네학회 질 스미시스상
영 왕립원예학회 금메달도 네차례
지난 2년 스미스소니언 연구센터서
난초와 곰팡이 공생 관계 연구
“곰팡이 없으면 난초 싹 못 터
난초 연구는 타 식물 보전에 도움”
최근 ‘식물학자의 숲속일기’ 출간
그는 앞으로도 연구에만 100% 시간을 쏟지는 않을 생각이다. 세밀화가의 길을 계속 가겠다는 뜻이다. “연구나 그림에만 100% 힘을 쏟지 않는 데 대한 죄책감이 사실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화가의 길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스미스소니언에서 저를 지도한 교수님도 저의 이런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시면서 그게 너의 운명이다고 격려해주셨죠.”
그림을 그리는 게 연구에 도움이 될까? 그는 바로 “아주 그렇다”고 했다. “그림을 그리려면 형태를 깊이 봐야 합니다. 2016년 한국 학자가 미얀마에서 발견한 포도과의 한 신종 ‘시서스 에렉타(Cissus erecta)’ 그림 의뢰를 받았는데요. 열매와 꽃을 함께 그리기 위해 그 종을 깊이 관찰하는 과정에서 꽃의 밑씨가 처음엔 네개였다 중간 단계에서 세개가 퇴화해 성숙한 열매에선 씨앗이 하나만 있다는 걸 알아내기도 했죠.”
신혜우 박사. 김영원 기자
요즈음 사람과 식물의 관계 맺기에 대해 식물학자로서 어떤 생각이 드는지도 물었다. “많은 사람이 장미를 좋아하지만 우리가 흔히 심거나 사는 장미는 모두 야생종이 아닙니다. 사람이 만든 거죠. 꽃잎이 많고 색이 화려하고 예쁜 식물을 좋아하는 대중적 취향을 집약해 사람이 조작한 겁니다. 심지어 수술과 암술을 없애기도 하죠. 원예용 수국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식물을 좋아하는 걸까요. 하지만 저는 식물을 먹거나 바라보거나 키우든, 곁에 두는 것은 좋다고 생각해요.”
왜 식물을 곁에 두는 게 좋은 걸까? “우리가 뭘 하든 대부분은 호모 사피엔스(인류)에 집중되어 있잖아요. 하지만 지구에 다른 종이 엄청 많아요. 870만종 이상이라고 추정됩니다. 다른 종에 시간을 조금이라도 할애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해요.”
식물학자의 길을 걷게 되어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는? “부모님이 너무 좋아하세요. 평화로운 직업을 선택했다고요. 제가 하는 일은 지구에 태어난 생명체로서 덜 이기적인 직업 같아요. 다른 생물을 알고자 하니까요.”
인터뷰 끝에 출판 계획을 물었다. “과학적인 내용이 조금 들어가는 16쪽 정도 되는 영유아 책을 쓰고 싶습니다.”
https://v.daum.net/v/20250420180002489
“식물 형태를 깊이 봐야 하니 세밀화 그림은 연구에도 도움”
[짬] 그림 그리는 식물학자 신혜우 박사 “요즘은 난초입니다. 난초는 종이 엄청 많지만 종의 개체 수는 많지 않아요. 그래서 멸종위기종이 많습니다. 난초를 연구하면 다른 식물 보전에도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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